| 우리 삶의 평생의 화두이자 근간은 '사랑'입니다.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 자체가 타인의 관심과 애정에 의해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아빠로서 찬우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매일매일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하는데요, 아이는 자신이 부모의 관심을 받고 있다고 느낄 때에만 혼자서 마음껏 놀이의 세상에 빠지곤 합니다. 아이가 자다가 일어났을 때 부모가 곁에 없으면 언제나 울음을 터뜨리곤 하는데요, 자신이라는 존재를 자각하는 순간 혼자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잘 놀다가도 문득 자기가 부모의 관심을 받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한답니다. ![]() 때때로 아이가 부모의 인내심을 시험하기도 합니다. 말도 안되게 떼를 쓴다거나 집안 물건을 파손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이럴 때 부모는 아이에게 무관심을 보이거나 필요할 경우 매를 들기까지 하는데요, 이럴 때 아이는 도망가기는 커녕 '필사적으로' 자신을 때리는 부모에게 매달리는 경향을 보인답니다. 야단맞을수록 더 안아달라고 보채기 때문에 결국 부모는 포기하고 안아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미워할 수도 없는 상황을 만들어 버리는데요... 아이에 따라서 패턴이 약간씩 다를 수는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는 아이들은 이렇게 부모의 외면이나 차가움을 감지하는 순간 애정을 확인하기까지 더욱 보채거나 매달리는 모습을 취합니다. 이렇듯 사랑은 자신의 존재감이자, 확인하기 어렵거나 결핍될 경우엔 공포의 대상인 것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우리도 찬우와 하나도 다를바 없죠. 찬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들 역시 누군가로부터의 사랑을 열망합니다. 내가 사랑받고 있다, 사랑하고 있다(사실 두가지는 동의어입니다) 를 인지할 경우에 우리는 사랑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다른 무언가에 관심을 뻗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시작할 때면, 필연적으로 다음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1. 좋아하는 감정을 확인한다. 2.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때로는 가슴 벅찰 정도로) 서로에 대한(본질적으로는 상대의 나에 대한) 깊은 사랑의 열정을 키워나간다(사람에 따라 열정의 정도는 천차 만별이긴 합니다). 3.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변함없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4. 이제 이를 바탕으로(기반으로) 내 삶의 의미있는 다른 무언가에 관심을 쏟는다. 아이가 부모의 사랑이 변함없음을 진정 믿을 때, 역설적이게도 아이는 부모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듯이, 사랑도 사랑을 확인하는 동안에는 사랑에 많은 것을 걸고 집착을 하기도 하지만, 나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는 사람이 확보된 마당에는 이제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게 됩니다. 즉, 사랑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서로를 바라보며 최대한 다가가는 것이 목적이지만, 그 다음부터는 함께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각자의 삶의 방향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든든한 기반이 확보되었으니 이제 그 이상을 바라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람마다 사랑을 구축하는 방법과, 사랑 에너지의 요구량에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함께 해 주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다 느끼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사랑받고 있음을 '끊임없이 표현'함으로써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각자의 사랑 에너지의 요구량이 다르게 되면 결국 서로를 바라보다 자신의 길로 고개를 돌리는 '시점'에 차이가 발생하게 되고, 한쪽은 상대가 변했다고 느끼게 되는 상황을 맞게 되는 겁니다. 사람마다 사랑 에너지의 요구량이 다른 이유는 '우리는 사랑일까'에서 알렝드 보통은, 각자가 구축한 사랑의 아키텍쳐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이의 관점에서부터 출발하면, 아이가 부모로부터 얼마나 적절한 사랑에너지를 느끼며 컸느냐에 따라, 어떤 이는 자신의 삶을 안정시키는 여러가지 축을 쌓아올리기도 하고, 그것이 불충분하여 부모의(때로는 애인의) 사랑이라는 한축만 세우기도 합니다. 알렝드 보통은 이를 '지성파 사랑'과 '낭만파 사랑'이라고 구분을 하였는데 (별로 와닿지 않는 이름의 구분이네요... ) 그림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성파는 자신의 존재감을 여러가지 축으로 안정화 시켜두는 유형입니다. 부모의 사랑도 한 축으로,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도 한축, 그리고 친구/동료등의 인정/사랑도 축으로 두면서 살아가는 유형입니다. 때문에 어느 한축이 흔들려도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구조물은 쉽게 붕괴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낭만파는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사랑에 자신의 많은 것을(경우에 따라서 모든 것을) 거는 유형입니다. 그래서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끼면 그 대미지는 상상을 초월하기까지 합니다. 자기가 사라져 버릴 정도의 충격을 던져주니까요. 우리는 건축가들을 낭만파와 지성파로 나눌 수 있다. 지성파 건축가는 건물의 무게를 여러 기둥(많을수록 좋다)에 분산하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삼아, 사고가 나더라도 다른 기둥들이 무너진 기둥의 몫을 나누어 지도록 한다.각각의 유형에는 장단점이 분명한 편입니다. 어떤 것이 더 우월하거나 좋다고도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보통 여러번의 사랑을 하는 것을 감안했을 때, 낭만파 사랑에서 느끼는 고통이 훨씬 크기 때문에 낭만파가 상대적으로 좋지 않다고 얘기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지성파는 낭만파 유형의 사람이 느끼는 깊은 사랑의 충만함을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낭만파는 함께 하는 미래의 중장기적인 플랜이 확고한 편이지만, 지성파는 일주일 앞도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이란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연인들이 처음으로 같이 잔 다음에는, 며칠 후나 몇 주일 후에 다시 만나자는 말이 중요한 의미로 해석되기 마련이다. 한 사람이 2주일 후인 "내 생일에 그 연극을 보러 가요."라고 하면, 그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그 제안에는 적어도 그때까지는 두 사람의 관계가 이어질 것이라는, 미묘하지만 분명한 뜻이 담겨 있다. 관계가 진전되면 한쪽이 시간의 틀을 확장하고 싶어지고, 어느 시점이 되면 자신 있게 "돈을 모아 내년 말에 스키를 타러 가는게 어때?"라거나 "은퇴 후에는 유람선 여행을 할까?"라는 말까지 하게 된다. 여러분은 어떤 사랑의 건축물을 세워 두셨나요? 나는 지성파야, 나는 낭만파야 하고 딱히 두가지로 구분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개념적으로 구분을 한 것일 뿐이지 이 두가지 개념 사이에는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고 봐야겠죠. 제가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것입니다. 결국 언젠가 우리들은 사랑을 일정 수준 완성한 다음에는 자신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부모의 품을 벗어나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해서 나가듯이, 이 때 부모는 작지 않은 상실감을 느낌에도, 그것이 아이의 자연스러운 성장이듯이, 우리 역시 열렬히 사랑하지만 결국 각자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상대가 변했다고 바라보기 시작하면 마찰이 생기게 되고 결국 서로에게 섭섭한 일들이 쌓이게 되고, 결국 소원해 지는 비극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각자가 구축하는 사랑의 아키텍쳐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해 줄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삶을 지탱하는 가장 든든한 힘 서로에 대한 사랑을 나의 마음 깊이 깔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성숙한 모습으로 당신과 함께 삶을 걸어갈 수 있을테니까요. 동의하시나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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