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ong.mybada.com/LILY/9067좋은 책입니다. 참 좋은 책이에요...

그림과 글이 함께 하는 에세이... 보통 책에 실리는 삽화나 그림은 그 글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이나 분위기를 표현하는 존재 정도의 주종의 종 관계에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책은 수평선 상에 서 있습니다. 한편의 그림책이기도 하고, 한편의 에세이기도 합니다.

매 장 장마다 군더더기 없는 정혜신 님의 짧은 이야기들도 참 와 닿고, 마음 속의 어떤 느낌을 잘 잡아내 주는 이명수 화백님의 그림도 참 좋았습니다. 책을 선물한 분께서 그림이 참 좋다, 그림을 놓치지 말라고 하셨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마음에 한번쯤은 꼭 담아두어야 할 좋은 책. 강추합니다.


p.5
머릿말 영감자에게
내 삶의 파트너이자 이 글의 영감자 이명수, 그림에세이는 그와 내가 주고 받았떤 대화록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내가 그와 가졌던 즐겁고 특별했던 대화가 나와 이 글을 익는 독자 사이에 대화로 번져나가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p.13
나를 긍정하기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배우는 그렇지 못한 배우에 비해 평균수명이 사년쯤 길다고 합니다. 자기 행위에 대한 심리적 보상이 있어서 그렇다는 거지요. 마라토너 이봉주도 똑같이 42.195km를 완주했음에도 우승했을 때와 그렇지 못했을 때는 몸의 회복 속도가 다르다는 겁니다.

남을 인정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진심으로 자기를 인정 혹은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을 내밀하게 만나는 일을 하다보면, 의외로 건강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곤 합니다.
'나를' 아름답다고 마음 깊이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너'를 긍정하는 일에도 예민할 수 있습니다.

p.21
히~끗

풍요로운 노후를 보내고 있는 팔순 노인에게 '이제껏 살면서 가장 후회스런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지나치게 심각하게 산 것'이라고 답하더군요. 그 말을 들은 후 "더 늦기 전에 '열심히-슬슬' 살아야지~"하는 기묘한 희망을 키우는 중입니다.

"아님 말고!"


영화감독 박찬욱 댁의 가훈이랍니다.


p.27 뻐꾹새 우는 소리

'솔직하게 말해서...'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나는 뒤끝이 없는 사람이야!'라는 후렴구를 빼놓지 않습니다.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야 더없이 후련하고 신나는 일이겠지만 곁에 있는 사람은 난감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솔직함'이 책임을 전가하거나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의 한 정당한 이유로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생각을 간혹 하게 됩니다. 지나친 솔직함은 때론 미성숙의 한 증거이기도 한대 말이지요.


p.37 선물
인디언들은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선물이 되는 세계'를 꿈꾸었다지요. 쉽지는 않겠지만 저도 같은 세상을 꿈꾸며 삽니다. 그렇게 나이를 먹으려고 노력중입니다.

p.49 뒷모습
어린 시절 동네에서 하루 종일 뛰어놀다가 저녁 어스름에 집으로 흩어지는 친구들 뒷모습을 보면서 어린 마음에도 친구가 '참 착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확실히 사람의 뒷모습은, 그 사람의 존재를 확인하는 쪽보다는 바라보는 사람의 속감정을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자극체에 가깝습니다.

남녀가 단지 뒷모습을 보이고 있을 뿐인데 그 정황들이 눈앞의 풍경처럼 머릿속에 펼쳐집니다. 그림을 보면서 불현듯 떠오르는 어떤 사람이나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본인도 미처 몰랐던 자신의 원형적 속감정일지 모릅니다. 사람의 뒷모습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속마음이 그대로 투과되는 잘 닦인 거울입니다.

p.53 같이 가자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외롭거나 상처받은 사람의 내면을 그리는 흔한 장면 중의 하나가 방 한구석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흡사 달팽이처럼 말이죠.

"다리를 접어 모아서 가슴팍까지 끌어올리고, 머리를 숙여 무릎 사이에 묻고..."

타인의 부재 속에서 홀로 몸의 '접촉 면적'을 최대한으로 넓히기 위한, 외로운 인간이 선택하는 무의식적 자세입니다. 강력한 밀착과 연대를 자가 발전해내는 일종의 생존 본능이기도 하구요.

p.55 충분한 슬픔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은 몰두할 만한 무언가를 찾거나,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하거나, 자신을 울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등의 공격적인 '마음 대응'을 합니다.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대응 방법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어려움을 겪고 난 일,이 년 후에 몸의 건강이 나빠지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런 심리방어기제를 채택했던 사람들이라는 연구 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어릴 적 자전거를 배울 때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던 얘기 중 하나는 '넘어지려고 할 때 넘어지는 방향으로 핸들을 꺾어야 넘어지지 않는다'는 역설같은 순리였습니다.

슬프고 괴로울 때 슬픔에 충분히 젖어들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그래야 마지막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p.57 완료에 대한 욕구
두 집단을 대상으로 한쪽은 영화를 끝까지 보여주고 다른 한족은 결말을 알지 못하도록 중도에 영화 감상을 중단시키는 실험이 있습니다. 몇 개월 후 그 반응을 살펴보면 영화를 끝까지 보았던 사람에 비해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줄거리를 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답니다.

사람에게는 완료에 대한 근원적 욕구가 있어서 종료되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남은 숙제를 풀려는 심리적 시도가 끈임없이 작동됩니다. 그런 연유로 영화의 결말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결말에 대한 추측을 계속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영화를 더 또렷히 기억하게 되는 것이지요.

(혁) 그래서 이루지 못한 사랑들에 대한 기억이 오래가고, 거기에 대한 집착을 하는 경우도 많은 것일까?

p.69 그리운 바람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때 사람은 행복했던 경험들을 떠올리며 자기회복기능을 발휘하기 보다 오히려 더 힘들었던 과거의 기억들을 자동적으로 떠올립니다.
 프로이트는 그 이유를 "주둔군 이론"으로 설명합니다. 전투에서 계속 고지를 점령해나가다 한 곳에서 실패했을 경우 통상 가장 어려운 전투를 겪었던 고지로 후퇴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 고지에는 가장 많은 주둔군을 남겨놓았을테니까요.
 살면서 유난히 힘들었던 그 지점에는 자신의 (심리적) 주둔군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셈입니다. 그 지점의 주둔군과 연합하면 최종고지에 바짝 다가갈 수 있습니다.
 사람이 '진심으로, 무의식적으로' 그리워지는 것은 따뜻한 볕이 들던 때가 아닙니다. 바람이 몹시 불던 어떤 시절일지 모릅니다.


p.83 남자의 거울
경험이 많은 노 정신분석가들이 흔히 하는 자기 고백 중의 하나는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문제를 제기하는 환자를 본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p.85 마지노선
반드시 지켜내고픈 마지막 자존심이나 자기 품위를 심리적 마지노선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표현하는 가장 일상적인 말은 '괜찮아요'입니다. 가슴에 총을 맞고 사망한 어느 전직 대통령이 남긴 마지막 말도 두번에 걸친 '난 괜찮아...'였다지요.
'괜찮아요'라는 말은 '괜찮고 싶다'라는 간절함이 묻어 있는, 실상은 썩 괜찮지 못하다는 반어법적 표현인 경우가 많습니다. 견뎌내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무의식적 자기 고백입니다.
저는 주위의 누군가가 '괜찮다'는 표현을 하면 혹시 그 사람이 지키고 싶은(혹은 지켜야만 하는) 최후의 지지선이 무너지고 있는 징후가 아닐까, 의심하는 직업병이 있답니다.


p.105 다녀왔습니다
정신과 의사로서의 경험으로 단언하건대, 절박한 순간에 자기 마음에 귀 기울여줄 '단 한 사람'만 있다면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젊은 나이에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던 한 영화감독은 "영화와 상은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젊은 나에게는 그 상이 필요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그 상은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격려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어린 시절 학교 갔다 집에 돌아왔을 때 누군가 반겨주면, 하다못해 그게 집에서 기르는 누렁이라 해도 갑자기 마음이 평안해졌던 것처럼요...


p.119 가지 않은 길
짜장면이 가장 맛있을 때는... 짬뽕을 먹고 있을 때라지요. 개인적 경험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은 짜장면과 짬뽕의 갈등처럼 수다스럽습니다. 종잡을 수 없습니다. 그림의 배경색처럼 현란합니다.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너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프로트스의 가지않은 길, 피천득 옮김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는 마지막 문장이 찌르듯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하지만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더라도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예언 같은 느낌은 똑같이 반복되겠지요.


p. 131 믿음의 태도
한 자동차 전문기자는 거리에서의 다른 운전자들을 '적'이나 '경쟁자'로 보지 말고 '운전동료'로 여기라고 충고합니다. 한마디로 믿으라는 거지요. 만에 하나 자신이 도로상에서 큰 사고가 났을 때 제일 먼저 구급차와 경찰차를 불러줄 사람은 가족이나 친구가 아니라 바로 주위의 다른 운전자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혁: 배우자, 함께 하는 이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p.139 행복한 옥수수
음식을 못 먹은 아이가 초췌한 것은 당연하지만, 놀랍게도 아이를 오랫동안 쓰다듬어주지 않고 만져주지 않으면 음식을 못 먹은 아이와 마찬가지로 수척해 집니다. 스킨쉽이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인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스킨쉽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는 '매'를 벌어서라도 불행한 스킨쉽이나마 확보하려고 듭니다. 식수를 구할 수 없으면 구정물이라도 먹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p.149 나무 사이
"내 일은 내가 하고, 당신 일은 당신이 하는 것. 내가 당신의 기대에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며 당신 또한 나의 기대에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 것, 당신은 당신, 나는 나, 우연히 서로를 발견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 그렇지 못할 땐 어쩔 수 없는 일."




[도서] 마음 미술관 : 정혜신의 그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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